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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 여행/산티아고 순례길 후기

[산티아고 순례길 후기23] 눈보라를 헤치고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를 지나갑니다.

by 완자야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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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3년 10월 ~ 11월에 부부가 같이 다녀온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의 기록입니다.

그 당시 틈틈이 적어두었던 기록과 기억을 토대로 순례여행 중에 있었던 일들과 당시 저희들의 느낌을 솔직하게 담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순례길을 준비하는 예비 순례자분들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고자 필요한 정보들을 정리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희들의 인생에서 값지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던 이번 순례여행의 기록들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이 제법 길기 때문에 후기글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읽으시길 권합니다.

도움이 될 만한 정보성 내용들은 볼드체(굵은 글씨) 명조체의 푸른색 글씨로 표기해 놓았습니다. 
정보가 필요하시다면 볼드체와 명조체의 푸른색 글씨 부분들 위주로 참고하세요.

그럼, 오늘도 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순례길 후기, 철의 십자가

 
 


2023년 11월 7일(화)
오늘은 몬테스 데 레온 산맥(Montanas de Leon)과 쎄로 델 피코 언덕(Cerro del Pico) 사이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그 유명한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를 지나갑니다. 철의 십자가는 오래전부터 버려진 집들로 가득했으나 순례자의 증가로 다시 회복된 마을이라고 알려진 폰세바돈(Foncebadón)을 지나서 약 2km 정도를 더 올라가면 나오는 언덕의 정상에 있습니다. 철의 십자가로 가는 길은 비와 우박, 그리고 눈보라를 뚫고 올라가야만 해서 무척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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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구간: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이동거리: 약 56.0km (16.9km 도보 + 15.5km 택시 + 23.6km 버스)

출발시간: 06시 25분

도착시간: 14시 20분

도착숙소: Viña Femita Albergue (사립)

 
 
오늘 철의 십자가를 지나가는 구간은 순례자들에게 큰 육체적 시련을 선사하는 고단한 구간이라고 합니다. 오르막길도 힘들지만 길게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더 힘든 구간이라고 합니다. '까미노 닌자' 앱으로 확인해 보니 실제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어제 아내의 무릎 등 저희들의 육체적 컨디션과 제한된 일정을 감안하여 일부 구간은 걷고 일부 구간은 점프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희들이 세운 계획은 이러하였습니다.
 
1) 라바날 델 까미노 - 엘 아세보 데 산미구엘: 약 16.9km 도보로 이동
 
2) 엘 아세보 데 산미구엘 - 폰페라다: 약 15.5km Taxi로 이동(산골 마을에는 버스가 없을 것이므로)
 
3) 폰페라다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약 23.6km Bus로 이동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였던 곳으로 가보고 싶었던 장소)

 
 
오늘은 약 17km를 걸어서 가야 하고, 걸은 후 산골 마을로 예상되는 엘 아세보(El Acebo de San Miguel)에서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Taxi를 잡아타고 폰페라다 버스터미널까지 가서, 오후 2시 37분 출발시간이 확정된 Bus를 타야만 했기 때문에 저희는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침 06시 20분, 원래 계획했던 시간 보다 20분 늦게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출발을 하려는데 아내는 배가 아픈지 다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도미토리로 들어갑니다. 밖에는 캄캄한 새벽어둠 속에서 비가 오고 있습니다. 알베르게 입구에서 비옷을 꺼내어 입고 6시 30분이 거의 다 되어서 출발합니다. 숙소 앞에 가로등이 있는 곳으로 가서 보니 비와 우박이 함께 내리고 있었습니다. 기온은 영상 1도임을 확인합니다.
 
마을을 벗어나니 곧 칡흑같은 어둠이 앞을 뒤덮었고, 저희는 헤드랜턴과 손전등을 킨 채 어둠을 물리치며 걸어갔습니다. 최근 계속해서 내린 비 때문인지 길은 젖어있었고 곳곳에 진흙과 물웅덩이로 걷기가 쉽지 않아 속도는 더디었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내리던 비는 점차 눈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축축하게 젖어 진흙처럼 변한 순례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구간 자체도 오르막이라 쉽지가 않지만, 길이 젖어있어서 더 힘들었습니다. 약 1시간가량을 걸어가니 하늘이 점점 밝아지고 눈앞의 광경들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발을 내딛기가 힘들 정도로 길은 물에 잠기다시피 물이 고여 있는 곳들이 많았고, 순례길 주변의 땅들도 물렁물렁하게 진흙화되어 발이 푹푹 빠져들었으며, 신발은 순식간에 축축해졌습니다. 밤새 비가 내린 탓도 있었고, 내린 눈이 영상의 기온에 녹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르막길을 따라서 비와 눈이 녹은 물은 시냇물처럼 순례길을 따라 흘러내리며 저희들의 발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날씨가 지금보다 더 추워서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냥 쌓였더라면 오히려 덜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순례길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날이었습니다.

 
 
순례길을 출발하기 전에 준비할 때 초겨울의 추위에 대한 예상과 염려들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내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눈이라 당황스러웠고 걷기가 어려워 불평이 들던 마음은, 이상하게도 걸어가면 갈수록 하늘의 축복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지난 10월 12일, 생장에 도착했을 때는 반팔을 입어도 땀이 날 만큼 무더운 여름날씨 같았으나, 생장을 출발한 후에는 어느덧 가을이 찾아왔었고, 이제는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된 것 같습니다. 약 1개월이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 4계절을 모두 다 만나게 되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높은 언덕으로 향할수록 눈발도 함께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합니다. 진흙화 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고 나니 순례길과 차도가 교차하는 지점이 나왔습니다. 잠깐 서서 구글맵과 까미노닌자 앱을 번갈아 비교해 가면서 길을 확인합니다. 순례길이 눈앞에 있는 차도를 따라서 폰세바돈까지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순례길이 아니라 차도를 따라서 걷기로 합니다. 진흙도 진흙이거니와 길 전체가 물 웅덩이처럼 된 곳들도 많아 순례길을 따라 걷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단, 눈이 내려서 평소 대비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으로 차량이 지나갈 경우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갓길로 붙어서 걸어갔고 차 소리가 들리면 멈춰서 차량이 지나간 다음 걸어갔습니다. 다행히 굳은 날씨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차량은 거의 없었습니다.

 
차도를 따라 걸으니 걸음이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조금 걸어가니 폰세바돈(Foncebadon)의 도착을 알리는 마을 표지판이 나왔고 커다란 십자가가 길 정중앙에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폰세바돈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저희가 출발한 라바날의 공립알베르게에서 이곳 폰세바돈 마을 초입까지는 약 5.5km 거리로 보통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이 곳에 도착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8시 26분으로 약 2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이 속도라면 오후 비야프랑카행 버스를 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폰세바돈에 도착한 저희는 잠깐 쉬어가기로 하고 갈만한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 겸 카페가 문을 연 것 같아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무심코 들어간 곳인데 굉장히 아늑한 분위기의 멋진 카페였습니다.

  
*Hostal-Restaurante El Trasgu de Foncebadón 알베르게 겸 카페: 폰세바돈 마을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라바날에서 출발하여 철의 십자가에 도착하기 전 잠깐 쉬어가기에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카페 내부 인테리어도 아늑하고 좋았으며 무엇보다 안쪽으로 가면 언덕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테라스가 있는데 정말 멋진 뷰를 자랑하는 곳이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문이 닫혀있었습니다만, 날씨 좋은 날 가게 된다면 괜찮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제공하는 샌드위치가 너무 맛있었습니다. 웬만한 대도시 유명 식당급은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각기 다른 샌드위치를 시켜서 반틈씩 나누어 먹었는데 둘 다 너무 맛있었습니다. 빵도 말랑말랑하였고, 빵 안의 고기와 채소도 신선했으며, 소스도 맛있게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사이즈도 큼직해서 배가 불렀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한국에서 오신 모녀 두 분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그분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셨다고 합니다. 모녀의 어머니께서는 이곳 숙소가 너무 깨끗하고 아늑하고 좋았다고 하셨고, 저녁식사는 사랑하는 딸과 만들어서 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숙박 환경도 괜찮은 것 같고 조리도 가능한 숙소인 것 같습니다.
 
구글맵의 리뷰를 찾아보니 평이 모두 다 좋습니다. 특히 음식이 맛있다는 평이 많이 있네요.
 
철의 십자가를 지나서 폰페라다까지 먼 거리를 가실 계획이시라면, 라바날에서 약 1시간 30분을 더 와서 폰세바돈에서 묵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세계 각국의 국기가 들어간 순례자 표시 브로치를 기념품으로 판매하고 있었고 태극기도 있었습니다.
 
- 위치: https://maps.app.goo.gl/PP81Z66G3RLSC3fA8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휴식을 가졌습니다. 제 마음은 급해져 있었기에 얼른 다시 출발하고 싶었지만 오늘따라 아내는 늑장을 부립니다. 거의 1시간이 다 되어서야 다시 출발할 준비를 합니다.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비옷을 다시 입고, 젖은 장갑을 끼고 카페를 나섰습니다.
 
그사이 내린 눈으로 세상은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갔습니다. 마을을 벗어나자 바로 산길이 이어집니다. 산길로 들어서자 바람은 더 거세어졌습니다. 산들은 하얗게 눈으로 뒤덮였고 사람이 다니는 길은 눈이 녹아 질척했습니다. 오르막을 오르니 끼어 입은 옷가지들로 인해 땀이 났으나 벗자니 날씨는 춥고 눈이 내려 그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아내는 발을 잘못 디뎠는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걸음을 멈춥니다. 늘 아프던 왼쪽 '무릎에 번개가 쳤다'고 합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잠깐 서서 쉬다가 조심해서 천천히 다시 걸어가기로 합니다.
 
그 와중에 눈이 내려앉은 풍경은 아름다웠습니다. 조금 게으를 것 같은 농부의 것으로 보이는 트랙터가 눈을 맞으며 서있고, 다른 곳에서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눈발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커져가는 눈발을 맞으며, 피하며 계속 걸어갑니다. 눈이 내릴수록 세상은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갔습니다. 하얘지는 풍경을 보며 내 마음도 저렇게 하얘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릴 때는 참 순수했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을 점점 더 알아갈수록 내면의 순수함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거나 이미 잃어버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조금 서글퍼졌습니다.
 
동시에 오랜만에 하얀 세상을 보니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던 저의 동심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기분과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도 비슷한 기분이 드는지, 추워서 새빨개진 볼을 한 채로 밝고 환하게 웃습니다. 아내의 백만불짜리 미소에 제 마음에 들었던 조급함은 사라지고 '그래, 버스를 놓치게 되면 뭐 어때, 그 또한 우리 순례 여행의 한 부분일 거야'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순례길을 따라 걷다가 차도로 나와서 다시 차도를 따라 걸어갔습니다. 약 30여분을 걸어올라 가자 저만치에서 그 유명한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가까이 다가오며 선명해지는 십자가 형상에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가 이내 차분해지는 듯하다가 제 마음은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혼란스러웠습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철의 십자가는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형상이었지만 알 수 없는 경이로움에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희랑 같은 날 생장에서 출발했던 '안티모' 동생이 순례길 초반에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생장 55번 알베르게에서 묵었는데 그다음 날 출발하는 날 아침에 알베르게의 주인장 어르신께서 출발하는 순례자들에게 작은 돌을 하나씩 나눠주시면서 나중에 철의 십자가에 도착한다면 이 돌을 거기에 놓아두고 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그 돌의 의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삶의 짐'이라고 하면서요.

 
아내와 저도 가지고 걸어오던 돌멩이를 배낭에서 꺼내어 십자가상 아래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각자 마음의 소원을 빌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다 힘든 순간이 오면 이때를 기억하고 잘 이겨내며 살아가는 저희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철의 십자가스페인어로는 Cruz de Ferro라고 하고, 영어로는 Iron Cross라고 표현합니다. 위치는 폰세바돈(Foncebadón)과 만하린(Manjarín) 마을 사이의 언덕 정상에 위치해 있는데 폰세바돈을 지나 약 30분 거리에 있습니다.
 
철의 십자가는 말 그대로 심플한 형태의 녹이 슬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철제 십자가로 약 5미터 높이의 나무 지주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의 설명에 따르면 철의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언덕의 정상은 과거에 선사시대의 제단이 있던 곳이었고, 로마 시대에는 길과 교차로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메리쿠리우스를 모시는 사제들의 제단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반면, 위키백과의 설명으로는 메리쿠리우스(Mercurius)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과 이익추구, 교역의 신이며 장사꾼, 속임수, 도둑의 신이었다고 합니다. 메르쿠리우스는 영어로 머큐리(Mercury)라고도 불립니다.
 
메리쿠리우스에게 사제들이 자칼을 바치는 제단이었던 이곳은 11세기에 가우셀모(Gaucelmo) 수도원장이 이곳에 처음으로 십자가를 세우면서 순례자들은 십자가를 경배하고 고향에서 가지고 온 돌을 봉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과 함께 순례자 자신들이 가지고 온 물건이나 사진, 쪽지, 기념물 등을 가지고 옵니다.
 
- 위치: https://maps.app.goo.gl/chT7PF6hVp2yE1Cn9


 
 
그때 마침 저희보다 이틀 늦은 거리에서 걷고 있는 패밀리들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의 날씨는 맑음입니다. 그리고 저희보다 이틀 뒤 '철의 십자가'에 도착한 패밀리들이 마주한 십자가는 저희가 마주했던 십자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십자가였습니다. 같은 길을 걷지만, 저마다 경험하는 세계는 제각각인 순례길입니다. 이 길에서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며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으러 오나 봅니다.

 
 
 
철의 십자가를 뒤로하고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눈보라는 여전히 휘몰아칩니다. 만하린(Manjarín)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자 오르막길은 내리막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눈이 잠시 내려앉았다 녹아서 촉촉해진 차도를 따라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질 듯 불안한 걸음을 내디딥니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몇 모퉁이 돌고 나자 눈이 그치고 구름이 걷히는 듯합니다. 걷힌 구름 뒤로는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는 폰페라다가 보이는 듯 합니다.

 
순례길 방향 표시석이 나오고 지금부터는 다시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내리막이 시작됩니다. 제법 굵은 돌들이 있는 길이라 미끄러짐에 주의가 필요한 길입니다. 아내와 저는 무릎 통증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에서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여 알고 있었기에 조심해서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약 15~20여분 정도 내려가자 오늘 저희들이 걸어서 가야 하는 최종 목적지인 엘 아세보 데 산미구엘(El Acebo de San Miguel) 마을이 내려다 보입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처럼 아름다운 풍경의 마을입니다.

 
마을은 언덕에 있어서 그런지 평지가 아니라 내리막길을 따라서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지나간 곳을 돌아오기 위해서는 오르막을 다시 올라와야 하므로 어느 카페(또는 식당)를 갈 것인지 내려가기 전에 확인하고 정하고 가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저희는 초입에 문을 연 곳을 지나치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가 문을 연 곳이 없어서 다시 마을 맨 꼭대기로 걸어 올라왔었습니다.
 
이곳 엘 아세보에는 자전거를 타고 순례길을 가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독일인 순례자 하인리히 크라우스(Heinrich Krause)를 기리는 자전거 모양의 철 기념물인 하인리히 크라우스 기념비(Monumento a Heinrich Krause)가 있다고 합니다. 위치는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출처: 구글맵, 대한민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엘 아세보 마을로 내려온 저희는 마을 초입에 있는 La Rosa del Agua 알베르게 겸 카페에 들렀습니다. 카페 내부는 다소 협소한 공간이었는데, 저희보다 먼저 도착한 각국의 순례자들로 내부는 혼잡했습니다. 마침 한 커플이 저희가 들어온 것을 보고 자리를 비워주어서 겨우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출처: 구글맵)

 
옆 자리에는 폰세바돈 카페에서 만났던 모녀가 먼저 도착해서 커피와 빵을 먹고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 모녀는 오늘 몰리나세카(Molinaseca)까지 간다고 하셨습니다.


*몰리나세카는 프랑스 길에서 만나는 마을 중 중세의 외관과 분위기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다리가 있는 곳에는 자연을 그대로 활용한 수영장이 있어서 여름철 이곳에서 묵어 가는 순례자들이라면 수영복을 챙겨가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이 맛있는 지역이라 식도락을 즐기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별 다섯 개를 줄만한 곳이라고 합니다. 몰리나세카를 대표하는 음식은 포도주, 만사나 레이네따(Manzana Reineta, 사과), 삐미엔또(Pimiento, 고추), 보띠요(Botillo, 소시지 종류), 세시나(Cecina, 육포), 뻬라(Pera, 배) 이렇게 여섯 가지인데, 이 외에도 다양한 음식과 후식들이 훌륭한 지역이라고 합니다.
(☞ 대한민국 산티아고 순례자협회 설명 바로가기)
 
이 설명을 보니 한번 가보고 싶어지는 마을입니다.


 
 
 
저희는 커피 한잔과 옆자리의 모녀가 추천해 준 케이크 하나를 주문한 뒤 카페 주인장에게 폰페라다로 가는 택시를 불러줄 수 있는지 문의를 드렸습니다. 그분은 기다려보라고 하시더니 다른 순례자들 일행과 대화를 잠시 나눈 후 다시 저희들에게로 왔습니다. 저희 외에도 폰페라다로 택시 이동을 원하는 순례자가 한 명이 있는데 동석해서 가는 것이 괜찮은지 물어보십니다. 흔쾌히 동의를 하고 진행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택시는 약 15~20여분 뒤 도착했습니다. 택시는 여러 명이 탈 수 있는 '승합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폰페라다로 가는 사람은 영국에서 온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폰페라다까지 택시 요금은 총 30유로(EUR)였고 3명이서 N분의 1씩 부담하기로 하여, 영국인 청년이 10유로를 내고 저희가 20유로를 냈습니다.

 
영어를 전혀 못하시는 택시 기사님은 60대의 스페인 남성분이셨는데 스마트폰 번역기 앱을 통해서 저희들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확인하신 후 목적지까지 가서 내려주셨습니다.
 
폰페라다 버스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버스 출발시간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 '철로 만들어진 다리'라는 뜻을 가진 폰페라다(Ponferrada)는 인구가 약 7만 명에 달하는 비에르소 지방의 제법 큰 산업 도시이며 경제적인 수도에 해당하는 도시라고 합니다. 온화한 기후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좋다고 합니다.
폰페라다는 옛날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하여 템플 기사단에 의해 보호되었고 그로 인해 도시에는 템플 기사단의 성벽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매년 여름이면 중세의 템플 기사단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또한 훌륭한 비에르소 지방의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들이 많은 도시라고 합니다.


 

 
폰페라다에서 저희는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까지의 버스요금은 오미오(Omio) 앱을 통하여 예매를 했고 요금은 2인 기준으로 모두 8.24유로(EUR)가 나왔습니다. 수수료가 절반입니다.
 
약 30여분을 달린 버스는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 도착했습니다. 오전의 눈보라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씨는 맑고 화창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보이는 밝은 햇살을 받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마을은 굉장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오늘 저희가 묵을 숙소는 비냐 페미타(Viña Femita Albergue y Restaurante)라는 사립 알베르게 입니다. 우연히 묵게된 이곳은 저희들의 순례길 중에서 묵은 최고의 숙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 비냐 페미타(Viña Femita Albergue y Restaurante) 사립 알베르게: 저희가 이곳을 예약한 이유는 구글맵의 리뷰가 하나같이 너무 좋았고 올라온 사진들도 괜찮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리뷰들 중 인상적인 것은 바로 '친절해도 너무 친절한 주인장'에 대한 리뷰였는데요, 젊은 현지인 남성인 주인장은 정말이지 제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단연코 가장 친절하고 사려 깊은 분이셨습니다.
밝은 미소로 저희를 맞아주셨고, 체크인 후도 지나가다가 눈만 마주치면 다가와서 '방은 괜찮은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미소 지으며 물어보셨습니다. 또 항상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하고, 너의 집처럼 편하게 사용해, 내 친구야'라는 말로 마무리해주셨습니다. 이곳에서 1박을 하면서 이분께 이 말을 한 대여섯 번 정도는 들은 것 같았습니다. 이 글을 작성 중인 지금 구글맵에 들어가 리뷰를 보니 1주 전의 리뷰가 올라와 있습니다. 한번 보세요. 정말입니다.

 
숙소의 컨디션 또한 아주 좋았습니다. 저희는 2인실에 묵었으나 10인실 도미토리도 2~3개 정도 있었고 2층 침대가 아닌 단층 침대로 매트리스 상태 또한 우수한 침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침구가 깨끗하게 세탁이 잘 되어 있어서 개인 침낭을 꺼낼 필요없이 숙소에서 제공하는 침구를 사용할 수 있었고 도미토리에도 수건 제공이 되었습니다. ( 그 당시 그 곳에서 도미토리에 묵으셨던 한국인 청년 한 분을 로비에서 만나서 잠깐 대화를 나누었는데, 도미토리 침구들이 너무 깨끗했고 수건까지 제공되어서 좋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인실에는 독립된 욕실이 있었고, 도미토리용으로도 남녀가 구분이 된 깨끗하고 넓은 샤워장과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세탁과 건조가 가능했고요. 단, 조리는 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신 식사가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우측 상단의 사진은 저희가 묵었던 2인실 룸이고(사실은 3인용 룸인데 저희들에게 제공해 주셨음), 그 아래에 베드가 여러 개 있는 사진이 도미토리입니다.

 
저희가 묵었을 때는 2인실이 49유로였고, 도미토리 베드는 인당 15유로였습니다. 저희 뒤에서 오고 있는 패밀리들에게도 공유를 해주었으나 안타깝게도 풀부킹으로 패밀리들은 다른 숙소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숙소 위치: https://maps.app.goo.gl/5mZLfbDwi8ifYeSu8 
- 숙소 홈페이지: https://vinafemita.com/


 
오늘 하루 종일 눈과 비를 맞으며 걸은 데다가 신발까지 젖었기 때문에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도 정비할 일이 많습니다. 대충 배낭을 풀어놓고 샤워를 합니다. 따뜻한 온수에 오늘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듯합니다. 그리고는 세탁을 하고 신발도 말립니다. 신발은 숙소 데스크에 부탁하여 신문지를 받아와서 신문지를 뭉쳐 넣은 뒤 라디에이터 앞에 놓아 두었습니다.
 
이제 밖으로 나가보았습니다. 여기도 몇 시간 전까지 비가 왔었는지 바닥은 젖어 있습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문을 닫은 슈퍼마켓이 있는데 내부가 보입니다. 한국 소주와 라면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순례길을 걸으며 한국의 까미노 열풍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것일 테지요. 앞으로 까미노에서 소주와 라면을 구하는 일은 점점 더 쉬워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조금 더 걸어 마을 중심부로 들어갑니다. 마을이 이쁩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우리 패밀리 '도나'양에 의하면 비야프랑카(Villafranca)라는 말의 뜻은 집을 뜻하는 빌라(Villa)와 프랑스, 프랑스사람을 뜻하는 프랑카(Franca)의 합성어로 예로부터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서 살던 곳이어서 지명에 비야프랑카(Villafranca)라는 단어가 붙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만났던 스페인의 시골 마을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이쁜 집과 상점을 지나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가 있다는 산 니콜라스 엘 레알(San Nicolas el Real) 호텔이 있는 곳으로 계속 걸어갑니다. 얼마 안 가 웅장한 건물이 한 채 나타납니다.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였던 알베르게의 입구는 호텔 건물의 우측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나온다고 아내가 알려줍니다.
(산 니콜라스 엘 레알 호텔 위치: https://maps.app.goo.gl/3sVLkfmpZuSLRZse7)

 
아내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갑니다. 건물 뒤편에 도착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스페인 하숙'의 촬영지였던 알베르게의 입구가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비수기여서 닫은 것인지 아니면 폐업을 한 것인지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호텔 건물은 굉장히 크고 웅장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고 이쁜 느낌의 마을이었습니다. 스페인이 아니라 프랑스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습니다.

 
걷다가 장갑을 파는 상점이 나왔습니다. 빨간색의 이쁜 장갑이 하나 있었습니다. 걸을 때 손을 많이 시려하던 아내를 위해 장갑 한 켤레를 샀습니다.

 
걷다 보니 벌써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숙소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내일 먹을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서 돌아옵니다.

 
숙소로 돌아와 방에서 잠깐 쉬다가 저녁 식사를 먹으러 갔습니다. 저녁식사는 숙소에서 14유로에 제공해 주는 순례자 메뉴였는데 굉장히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식당으로 가니 친절한 주인장께서 테이블을 안내해 주시고 메뉴를 보여주십니다. 애피타이저 하나와 메인요리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애티파이저로는 아내는 볼로네제 스파게티(Spaghetti bolognese), 저는 병아리콩 스크램블(Chickpea scramble)을 주문하였습니다. 저는 스파게티와 스크램블 둘 다 맛있게 먹었고, 아내는 스파게티보다 스크램블이 더 맛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메인 요리로는 아내는 소고기 스테이크(Fillet of beef), 저는 로마식 헤이크 생선 튀김(Roman-style Hake)을 시켰습니다. 아내도 저도 소고기는 평범했으나, 생선 튀김요리는 역대급으로 맛있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습니다. 헤이크(Hake)는 대구류 생선이라고 합니다.

 
와인도 넉넉히 제공이 되었고요, 식사를 마치고 나면 디저트가 있었는데 저희는 아이스크림을 먹었습니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가 밤공기를 잠깐 마시다가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배낭을 싸고 내일 일정을 점검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은 라 포르텔라 데 발카르세(La Portela de Valcarce)까지 약 14.2km를 걸어간 후, 택시를 타고 약 35.4km 더 가서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까지 이동할 예정입니다. 프랑스길에서 피레네 산맥 다음으로 높고 험난한 구간으로 알려진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를 현재 저희들의 신체적 컨디션으로는 걸어서 넘어갈 자신이 없었기도 했고, 제한된 일정으로 해당 구간은 '점프'할 예정입니다. 내일이 마지막 점프입니다. 트리아카스텔라부터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걸어서 갈 예정입니다.
 
그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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